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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희②, “대구의 단칸방 소녀 서울시장에 도전하다”
  • 공희준 편집위원
  • 등록 2021-01-09 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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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범한 시민들이 ‘한국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서울을 만들겠다
정치인들이 선거철을 맞아 발간하는 책들에는 상투적인 공통점이 있다. 무척이나 힘들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신파조의 애절한 회상이다. 그동안 너무나 식상하게 느껴지던 정치인들이 상투적 과거 회상도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깨끗하게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소위 번듯한 집안에서 태어난 스펙 좋은 인사들이 제도정치권에 입문하는 경우가 더욱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요즘에는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의 구분 없이 젊은 신진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부잣집 자제들이기 마련이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중앙정치무대에서는 신인급 인사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그는 세대적으로는 모두가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성장기를 보낸 세대에 속한다. 조은희는 자신의 가족이 ‘한국의 꿈(Korean Dream)’을 이룬 사례임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으며 그 과정에 운도 크게 따랐음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했다. 작게는 조은희의 개인사 혹은 가족사이자 크게는 산업화시대 한국사회의 풍속사이자 생활사일 수도 있는 조은희의 어린 시절 회고담을 들어봤다.

공희준(이하 공) : 구청장님께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저도 조은희 구청장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구청장님께서 발표하선 서울시장 선거 출마선언문을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정치 고관여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조은희가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해 모르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인 조은희는, 그리고 이에 앞서서 인간 조은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요? 구청장님께서 정치인 조은희에 대해, 그리고 인간 조은희에 대해 직접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은희는 행정의 열매를 맺는 사람


조은희 구청장은 서울-제물포 터널공사 현장 등 서울 구석구석을 쉼없이 둘러봐왔다. (사진 서초구청)

조은희(이하 조) : 바로 어제인 1월 6일 수요일 오후, 제가 얼마 전에 펴낸 책의 북 콘서트를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공 : 책의 제목을 이참에 좀 알려주세요. 모든 성공적 홍보의 출발점은 적극적 자기 홍보입니다. (웃음)

 

조 :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려니 조금 쑥스럽기는 한데 기왕 물어보셨으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귀를 열고 길을 열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의 북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인사들께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이 윤형주 선생님이십니다.

 

공 : 트윈폴리오의 통기타 가수 윤형주 씨 말씀이신가요?

 

조 : 예, 그렇습니다. 윤형주 선생님께서는 저를 “행정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정말 과분하게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수 추가열 님께서도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공 : 이수만 회장의 SM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유일한 통기타 가수였던 추가열 씨요?

 

조 : 예. 추가열 님께서는 제가 관공서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사촌처럼 보인다는 취지로 응원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성균관대학교의 토마스 교수님으로부터 오래전에 영어를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토마스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온 한 중년 여성이 서울시청 고위직에 있는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공 : 토마스 교수님은 구청장님을 늦깎이로 영어 공부하러 들른 보통의 가정주부로 생각했다는 의미네요.

 

조 : 예. 토마스 교수님께서 저를 어떻게 호칭했으면 좋겠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그냥 친근하게 ‘은희’로 불러달라고 대답을 드렸었습니다.

 

공 : 그런데 갑자기 영어를 왜 학습하기로 결심하셨나요?

 

조 : 수도 서울의 정부부시장으로 있다 보니까 여러 국제행사에 참석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벌 도시인 서울의 행정을 책임진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활발한 국제협력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서울시 부시장임을 알게 된 토마스 교수님께서는 크게 놀라신 표정이었습니다. 토마스 교수님께서는 이번 북콘서트에서 그때 일을 회상해주셨습니다.

 

저는 잘난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스무 살 무렵에 서울에 처음 와봤을 만큼 평범한 출신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 저 혼자 혈혈단신으로 도착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는 그날도 일을 나가셔야만 했고, 어머니께선 몸이 편찮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공 : 구청장님 아버님께서는 그때 어떤 일을 하고 계셨나요?

 

조 : 직물공장에서 공장장 비슷한 역할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이후에 독립해 직물공장 운영을 직접 시작하셨습니다.

 

공 : 다른 제조업도 전부 마찬가지겠지만, 섬유공장이나 의류공장이 매우 힘든 일 아닌가요?

 

조 : 아주 힘든 업종이죠. 어머니께서도 직물공장에 출근해 제품에 하자가 있는지를 거의 하루 종일 서있다 시피하며 일일이 확인하고 검사하셨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 허리가 많이 아프세요. 부모님께서는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저희 3남매 교육에 완전히 올인해 저희를 뒷바라지하셨거든요. 물론 저희 부모님만 고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제 아버님 직업이 원래는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중도에 교직을 접고 공장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공 : 지금은 월급도 많이 주고 직업의 안정성도 제일인 터라 다들 초등학교 교사를 하려고 난리인데, 과거에는 교사가 매우 박봉이었던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 : 그렇죠. 아버님이 교사를 그만두시고 공장에서 일터를 잡으시는 일을 계기로 저희 가족 전체가 청송에서 대구로 이주하게 됐습니다. 공장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한 양철집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세를 들어 살았어요. 그렇게 힘들게 출발했지만 부모님께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고, 자식들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희 3남매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자식들이 지금은 나름 다들 잘됐습니다.

 

공 : 그야말로 ‘코리안 드림’의 전형적 상징이시네요.

 

조 : 이왕이면 ‘한국의 꿈’이라고 말씀해주세요. (웃음)

 

공 : 아, 그러고 보니 구청장님께서 영문학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갈아타신 분이네요. (웃음)

 

방배동에서 제3한강교까지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서울에 처음 올라오던 시절의 웃지 못할 해프닝을 소개하며 자신과 서울 모두가 그동안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를 은연중에 강조했다. 이미지는 영화 「제3한강교」의 신문광고조 : 제 부모님들께서도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처럼 당신들 스스로를 위해선 바라는 것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평생 동안 근검절약을 실천해오셨습니다. 단지 원하는 게 있다면 저희 3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는 일뿐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일을 나가시면 집에는 3남매만 자연스럽게 남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두부찌개를 한 냄비 가득 끓여놓고서 공장으로 향하시곤 했습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두부 역시 귀한 먹거리라 어머니께서는 양을 많게 하려고 찌개에다가 일부러 물을 흥건하게 붓곤 하셨어요.

 

공 : 다른 음식도 한두 가지 있었을 건 같은데요?

 

조 : 어머니께서는 보통은 두부찌개와 콩나물무침을 반찬으로 차려주신 다음 일터로 가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두부찌개와 콩나물무침을 굉장히 좋아하고 잘 먹습니다.

 

공 : 어렸을 때 많이 먹던 음식을 나이 들어서는 절대 먹지 않는 사람이 있고, 즐겨 먹는 사람이 있는데 구청장님께서는 후자의 범주에 속하시네요. 저는 전자에 해당하는데….

 

조 : 음식이 귀하다 보니 3남매는 두부찌개를 서로 먼저 먹으려고 아우성을 쳤어요. 종종 찌개가 남으면 짓궂은 성격이었던 제 오빠가 찌개를 모종의 수단을 동원해 찜했습니다.

 

공 : 어떤 모종의 수단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 않아도 대뜸 상상이 됩니다.

 

조 : 오빠는 그걸 ‘압수’라고 익살맞게 표현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개의치 않고 먹었습니다. 먹을 게 워낙 모자른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잖아요.

 

공 : 비위가 엄청 강하신 성격이네요. 그런데 오빠 말고 다른 남자형제 한 분이 구청장님 손위인가요, 아니며 손아래인가요?

 

조 : 동생입니다.

 

공 : 자라실 때는 남자형제들 틈에 부대끼셨을 텐데, 대학은 여대를 가셨습니다.

 

조 : 제가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모습을 지켜본 친척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저희 부모님을 다소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사치스럽게 딸까지 대학을 보낸다고요.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상의 반영이었어요.

 

저희 아버님이 서울사대를 졸업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어렵게 학교를 다니셨습니다. 아버님 고향이 청송인데, 청송이 그리 잘사는 고장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대학을 다니실 때는 서울대 캠퍼스가 종로구 동숭동에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대학생 시절에 이대생들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동숭동에서 신촌으로 갈 차비조차 마음 놓고 지출할 수 없는 궁핍한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제가 이대를 들어가겠다고 하니 이제야 이대생 얼굴을 보게 됐다며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대학시험을 칠 무렵에는 특차제도라는 게 존재했습니다. 예비고사 성적이 우수한 수험생은 본고사를 치지 않아도 대학에 합격을 시켜주는 제도였습니다. 제가 그 특차제도로 이대에 입학했습니다.

 

공 : 그럼 장학생으로 들어가신 건가요?

 

조 : 제 기억으로는 그즈음은 이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오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 바람에 기차를 거꾸로 탔습니다. 서울행이 아닌 부산행 기차에 그만 올라타고 말았어요. 저는 기차가 한참 달린 후에야 행선지가 틀린 열차를 탄 사실을 깨닫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저는 승무원 한 분을 붙잡고 통사정을 했고, 마침내 밀양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로 다행히 열차를 바꿔 탈 수가 있었습니다.

 

공 : 서울에 와서는 어디에 머무셨나요?

 

조 : 제 외갓집이 방배동에 있었습니다.

 

공 : 구청장님께서 대학입시를 치실 때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이전의 시점일 테니 방배동이 사실상 허허벌판일 때였겠네요?

 

조 : 제 외갓집이 잘사는 편이었어요. 저는 외갓집에서 제대로 된 서양식 화장실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공 : 한국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분들을 만나보면 대다수가 자기는 사돈의 팔촌까지도 전부 다 헐벗고 굶주렸다는 신파조 이야기를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데, 구청장님께서는 외갓집은 잘 살았다고 아주 기탄없이 털어놓으시네요.

 

조 : 잘살았으면 잘살았다고 솔직히 밝혀야죠. 아버지께서 일하신 공장이 사실은 큰외삼촌이 경영하던 곳이었습니다.

 

공 : 아버님께서 처가살이를 하셨던 셈이네요?

 

조 : 그렇다고 봐야죠. 서울역에서 기차를 내렸으니 방배동으로 가려면 한강을 남쪽으로 다시 건너야만 했습니다. 혜은이 선생님이 부른 「제3한강교」란 노래가 한창 인기를 끌던 때였어요. 저는 제3한강교를 버스를 타고서 건너며 촌에서 올라와 무지 출세했다고 속으로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시내버스에 탑승해 통과한 교량이 제3한강교가 아니라 한강대교였습니다. 한강다리 이름도 정확히 모를 지경으로 제가 그때만 해도 서울 지리에 몹시 어두웠어요.

 

공 : 그런데 지금은 서울시장에 도전하시니 격세지감, 괄목상대, 상전벽해, 인생역전, 일취월장 뭐 이런 단어들이 막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네요.

 

조 : 제3한강교가 현재의 한남대교입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제가 혜은이 선생님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어요. 우리 서초구 주민이시거든요. 서초구에서는 서초컬처클럽이라는 문화예술인 단체가 활동하는 중인데, 이곳에서 진행하는 자선콘서트에 혜은이 선생님께서도 출연하셨어요. 서초구가 이 자선콘서트를 후원하게 되어 그 인연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성장기에는 문화의 혜택을 풍성하게 받기는 힘든 처지였어요. 저희 가족이 공장 근처의 양철집에서 단칸방으로 세를 살다가 공장에서 지어준 사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습니다. 저에게는 공장이 어린 시절의 삶의 배경이었어요. 때로는 놀이터도 돼주었고요.

 

어린아이였던 저에게 용돈을 주실 만한 어른은 오직 큰외삼촌뿐이었습니다. 오빠와 남동생과는 달리 저는 붙임성이 좋은 때문인지 외삼촌으로부터 자주 용돈을 받았습니다. 삼촌께서는 용돈으로 1원을 주셨는데, 저는 그 1원을 받으려고 외삼촌을 끝까지 집요하게 따라갔습니다.

 

공 : 용돈 스토커시라는…. 돈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 다리 내놔”가 아닌 “내 용돈 내놔”처럼 생각될 수도 있어서요.

 

조 : 용돈은 저 혼자 받았지만 쓸 때는 늘 형제들과 함께 나눠 썼습니다. 외삼촌으로부터 악착같이 받아낸 1원으로 뻥튀기 과자를 사서 오빠와 남동생 두 사람까지 더해 셋이서 항상 같이 먹었어요.

 

공 : 그때 1원이면 지금 물가로 얼마쯤 나갈까요?

 

조 : 제 어림짐작으로는 현재 돈으로 300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부모님께서는 그 1원조차 자식들에게 걱정 없이 주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살짝 목이 메여온 목소리로) 하지만 지금은 제가 남편도 잘 만나고 해서 금전적으로 비교적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오빠는 법조인이고, 남동생은 한국에서 교수로 일하다 미국에 갔으니 제 친정식구들이 이제는 다들 개인적으로는 큰 시름없이 생활하고 있어요.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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