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정치는 왜 비루해졌나 : 비루함의 평범성
  • 공희준
  • 등록 2020-03-26 17:22:54

기사수정

비루함의 종횡무진


20세기 독일사회의 비극이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됐다면, 21세기 한국정치의 비극은 비루함의 평범함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미지는 악의 평범함을 갈파해놓은 책인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표지풍경 1 : 옷값 1~2만 원 아끼려고 유니클로 매장에만 드나들어도 마치 일본에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이라도 되는 양 거칠게 몰아붙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런 험악한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조성한 문재인 정부의 전직 청와대 참모가 알고 보니 일제 고급 자동차 브랜드의 대명사인 렉서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위선의 범주를 진즉에 벗어난 경지다. 한마디로 비루하다.

 

풍경 2 : 그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상남자 중의 상남자인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등장하는 마초형 국회의원이었다. 허나 생물학적 연령이 환갑 가까운 나이에 다다른 이 정치인은 울고 불며 하는 눈물쇼까지 동원한 끝에 후배 정치인, 그것도 여성인 후배 정치인으로부터 지역구 공천권을 기어이 뺏어내고야 말았다. 미래통합당을 무대로 벌어진 지질하다 못해 비루한 촌극이다.

 

‘비루하다’는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비루함은 축약하자면 행동이 너절함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철통같이 경비되는 은행을 털면 악하기는 해도 비루하지는 않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짓인 탓이다. 반면에 할머니들이 힘들게 모아놓은 폐지를 팔다리 멀쩡한 젊은 청년이 슬쩍해간다면 그야말로 비루한 짓거리일 수밖에 없다.

 

21세기 한국정치의 뉴 노멀(New Normal)은 바로 이 비루함이다. 입으로는 친일잔재 청산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안정성과 승차감이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일제 자동차를 구입하는 식이다. 앞에서는 거침없는 독설과 막말을 항우 장사처럼 호탕하게 뱉어내지만 뒤에서는 공천권자인 당대표의 환심을 사고자 연약한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에 가련한 표정을 머금고 애절하게 몸부림친다. 두 가지 경우 전부 사악하다고 욕하기에는 지나치게 너절하고, 위선적이라 비판하기에는 사적인 욕망의 표출이 놀라울 만큼 적나라하다.

 

한 사람의 비루함은 개인적 층위의 문제일 뿐이다. 당사자 혼자 몸의 거시기 잡고 반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무리지어 비루해졌다면 구조적 차원과 시대적 관점에서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비루함은 이제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병증이 되었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모두 극복한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세력마저 이 비루함의 저주로부터는 자유롭지 않다. 국민의당은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는 비루한 측면대결의 길을 선택했고, 민생당은 계파 수장들이 다른 정당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부의 비례대표 공천경쟁에 사활을 거는 비루함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21세기 한국정치의 비루함은 온갖 선명하고 진보적인 미사여구로 자신의 몸값을 올린 다음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급조한 위성정당 또는 혹성정당에 언죽번죽 올라탄 각종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추레하고 약삭빠른 영악한 처세술에서 마침내 정점을 찍는다.

 

도전과 모험만이 비루함을 막는다


위대함과 평범함의 중간에는 한강이 흐른다. 평범함과 비루함 사이에는 샛강이 흐른다. 위대한 인간이 평범해지기는 어려워도, 평범한 사람이 비루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득적 특장점이 아니다. 난관 가득한 목표와 과제에 불굴의 의지로 쉬지 않고 도전하는 고단한 모험의 과정에서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덕목이다. 비루해지지 않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도가 위대해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는 데 있는 까닭이다.


한국정치의 총체적 비루해짐에는 유권자인 인민대중의 판단착오가 결코 작지 않게 작용해왔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정치에는 도전과 모험이 있어야 마땅할 자리에 소통과 공감이라는, 서구에서 건너온 이상야릇한 요소가 정치지도자가 반드시 갖춰야만 할 필수적 자질처럼 통용돼왔다. 그로 말미암아 정치인 본연의 사명이자 역할인 책임과 결단은 유행 지난 헌옷같이 방기돼왔다. 결단의 중요함을 깨닫고 책임의 무거움을 짊어질 마음도, 능력도 결여된 평범한 소인배들이 소통과 공감의 미명 아래 끊임없이 여의도로 밀려들어온 결과가 오늘날 목도되는 한국정치의 총체적 비루해짐이라고 하겠다.

 

평범한 장삼이사의 비루함이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라의 미래를 결단하고 민족의 운명을 책임져야만 할 정치인들의 비루함은 국가공동체 전체의 공멸로 머잖아 귀결되기 마련이다.


큰 도전과 큰 모험이 실패하면 큰 대가가 따른다. 작은 도전과 작은 모험이 실패하면 적은 비용이 따른다. 아무런 모험과 도전에도 착수하지 않으면 당연히 아무 손해도 따라오지 않는다. 도전과 모험이 없음을 두려워하면 위인이고, 손실과 대가가 따름을 무서워하면 범인(凡人)이다. 지금의 한국정치의 비루한 자화상은 손실과 대가가 따를 수도 있음을 겁내는 범인들이 정치를 한다는 점과, 이러한 보통의 범인들을 공감과 소통에 능하다면서 막무가내로 추종하는 우매한 민중이 있다는 사실이 합작해 그려낸 희대의 망작인 셈이다.

 

서두에 언급한 렉서스 가진 반일 변호사도, 공천권자 면전에서 질질 짰을 상남자도 본디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그들은 단지 평범한 사내들일 따름이었다. 이들의 하찮은 평범함은 정치라는 공적인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곧장 치명적 비루함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정치를 하고 있거나, 정치를 하려는 이들에게 진지한 어조로 권유하는 바이다. 위대하게 결단하고 장렬하게 책임질 생각이 없으면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라고. 왜냐면 훌륭한 정치의 본질은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이기 때문이라고.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서초구
국민신문고
HOT ISSUE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서울시, 모아타운 4곳 신규 확정…3,570세대 주택공급 본격화 서울시가 노후 저층주거지의 정비를 본격화한다. 시는 10월 16일 제15차 소규모주택정비 통합심의 소위원회를 열어 종로구 구기동, 관악구 난곡동, 동작구 노량진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 4개 지역의 모아타운 사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으로 총 3,570세대의 모아주택(임대 852세대 포함)이 새롭게 공급될 전망이다.서울시는 공공참여..
  2. 신한카드, 네이버페이 개인사업자 전용 ‘Npay biz 신한카드’ 출시 신한카드(사장 박창훈)는 스마트스토어와 스마트플레이스 등 네이버 기반의 350만 개인사업자를 위한 ‘Npay biz 신한카드(네이버페이 비즈 신한카드)’를 출시했다고 15일 밝혔다.  ‘Npay biz 신한카드’는 네이버 생태계를 기반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개인사업자 대상 특화 상품으로, 국내외 가맹점에서 전월 이용 금액 관계없이 최대 1.5% N...
  3. 남동구, 전재울근린공원 맨발산책로 정비…이용객 안전·편의 강화 인천시 남동구는 구월동 1501번지 일원 전재울근린공원의 맨발산책로 정비사업을 완료했다고 17일 전했다.전재울근린공원은 맨발산책을 즐기는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안전시설 확충과 그늘막·벤치 등 휴게시설 설치 요청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이에 남동구는 쾌적하고 안전한 맨발걷기 이용환경 조성을 위해 8천만 원의 예산을 들.
  4. 부평구, 2025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활성화 유공 시상식에서 국무총리상 수상 부평구(구청장 차준택)가 17일 충청북도 청주시 소재 청주오스코에서 열린 `2025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활성화 유공` 시상식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고 밝혔다.중소벤처기업부는 매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활성화에 기여한 우수상인, 시장, 지원단체 및 지방자치단체를 선정해 포상하고 있다.앞서 구는 ▲전통시장 고객지원센터 건립 ▲전통.
  5. 삼성, 10월 22일 ‘갤럭시 이벤트’ 개최…AI 네이티브 시대 연다 삼성전자가 10월 22일 오전 11시(한국시각) ‘삼성 갤럭시 이벤트(Samsung Galaxy Event)’를 열고, 구글·퀄컴과 함께 개발한 ‘안드로이드 XR(Android XR)’ 기반의 차세대 AI 네이티브 기기와 ‘프로젝트 무한(Project Moohan)’을 공개하며 멀티모달 AI 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삼성전자는 15일 ‘멀티모달 AI의 새로운 시대...
  6. `평택 통합 30주년, 평택 EVERYONE 축제` 개최 평택시(시장 정장선)는 평택시 통합 3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25일(토)부터 26일(일)까지 이틀간 소사벌레포츠타운에서 `평택 통합 30주년, 평택 EVERYONE 축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이번 축제는 시민과 예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참여형 축제로 지난 30년간의 성장과 통합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 100년을 향한 도약의 뜻을 시민과 함께 나누.
  7. 군포시, `2025 대한민국SNS대상` 최우수상 수상 군포시가 `2025 제15회 대한민국SNS대상` 기초지자체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SNS 소통도시`로 자리매김했다.군포시는 지난 7월 `소셜아이어워드 2025` 인스타그램 부문 최우수상에 이어 이번 대한민국SNS대상에서도 최우수상을 거머쥐며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소셜아이어워드가 개별 채널의 혁신성과 완성도를 평가한다면,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